크래쉬(Crash) - 그 벅찬 안아줌에 대해.





크래쉬는 갈등과 이해와 그 포용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에선 인간과 인간이 화해하는 장면에서 꼭 포옹이 등장한다. 온몸으로 상대를 감싸안음.. 내 피부로 그 사람을 느낌.. 나의 체온으로 그를 달래줌.. 당신의 가장 가까운 곁에 내가 이렇게 서 있음을 알려 줌..

지금으로부터 3년쯤 전이었던가.. 나는 길가에서 어떤 여자애를 위해 택시를 잡고 있었다. 그 직전에 조금 싸웠던가, 아니면 서로 불편한 마음이 남아 있었던가.. 택시가 이윽고 멈췄고 나는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택시에 오르려던 그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로변에서 그녀는 나를 힘주어 꼭 안았다. 그 순간 그녀의 체온과 그 마음이 느껴졌고 잠시 후 나는 따뜻해졌다. 그때의 그녀는 그후 쉽게 잊혀졌지만 그날의 포옹만큼은 느낌 그대로 나에게 남았다. 난 그것이 하나의 따뜻한 소통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후 나는 내가 진심을 담아 나의 마음을 전달해주고 싶을때, 다독거려 주고 싶을때, 너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을때, 너에겐 내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을때.. 그럴땐 늘 그를 힘주어 안아주고 싶어진다. 가만히 서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우리는 서로가 있기에 외롭지 않은 존재들이라고 호소하고 싶어진다.


... 나는 너를 충분히 안아주었던가.


그들의 온 힘을 주어 서로를 안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혼자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게 언제든, 다시 만날땐 너를 꼭 힘껏 안아주리라고 생각했다..





Closer - 문득 무거워진 어떤 영화.


클로저를 봤다.

약간의 취기와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이 영화가 너무나 보고 싶어졌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dvd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이제 '의미심장한 영화'가 되어버렸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 영화를 볼때마다 떠오르는 어떤 사람과 어떤 순간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므로.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나는 꽤 많은 영화를 봐왔고, 대부분의 영화들은 충분히 좋은 영화였는데.. 다 못봐서 아쉬움이 남은 영화라면 이것말고도 여러편이 있었을텐데..

그러나 그 이유를 찾으려는 행동은 덧없는 짓일거 같다. 대부분의 인연이란 꼭 그것이 아니어도 상관 없었을텐데도, 어느새 그 자리에 있어 어찌 할수 없어지는 것들일테니깐.

영화를 보는 내내 심란했다. 처음엔 함께 보던 그 (온전히 행복했던) 순간들이 떠올라서 마음을 헤집더니, 영화가 진행 될수록 각 인물들이 펼치는 사랑과 집착과 기만의 복잡한 이야기들이 그 헤집혀진 자리를 대신 파고 들었다.  나는 내가 그들인듯 멍하게 영화속 인물들에게 빠져 들어갔고, 영화가 끝날때쯤엔 마음 한구석에 빈 구멍이 생긴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그 빈 구멍이 들킬까 옷깃을 꽁꽁 여미며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새벽의 거리를 걸으며나는 복잡한 상념들에 잠겼다. 우리와 영화와 그 인물들과 그 순간들과 그 감정들에 대한 끝없는 생각들. 그러다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앞으로 십년쯤 후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때에는, 그냥 씩 웃으며 볼 수 있을만큼 많은 것이 명확해질지에 대해서. 또한 영화가 던진 질문들에 대해 자신있게 대답할수 있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단지 기대일뿐, 별로 그럴거 같지는 않다고 나는 예감 했다.

이제 봄공기가 얼굴에 와닿는데, 그런 아침에 든 생각치곤 이것은 꽤 씁쓸한 느낌이었다..








브로크백 마운틴 - 손쉬운 관용.


제목 : 브로크백 마운틴 (Brokeback Mountain, 2005)
감독 : 이안
출연 : 히스 레저, 제이크 질렌홀, 앤 헤서웨이


동성애를 그린 영화는 이제 그닥 특이할 것도 없다. 그들의 사랑이 더 추잡스럽다거나, 혹은 더 아름답다거나 주장한다는 것은 자신의 선입견에 대한 난감한 증명일뿐. 그들도 보통의 인간으로서 사랑을 한다는 믿음은 이 시대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의무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포용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실제로 한국의 남자 동성애자들은 3류 극장에서의 헌팅, 화장실에서의 즉흥섹스, 문란하다고 얘기할수 있는 잦은 파트너 체인지, 남창 매춘, 군대에서의 성추행 등의 어두운 선입견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고, 그 상당부분은 우리의 실제 현실과 관련된 부분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 영화속의 인물들과 같은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게이들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에겐 도저히 이성으로서는 설득 불가능한 사안들이고, 어려운 성장환경에서 비뚤어진 한 인간을 이해는 할수 있지만 받아들이기는 힘들어하듯, 전폭적인 지지는 쉽지 않은 것 또한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안감독은 역시 사람들의 그런 '정서적인' 거부감을 아주 잘 인식하고 있는듯 보인다. 이들의 섹스는 영화 초반에 단 한번 등장할뿐, 그 이후는 오로지 관계에 대한 감정 묘사로만 일관한다. 얼핏 우정과도 흡사한 아주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들이 나이 들어 호수 앞에서 야영을 할때도 그들의 육체관계는 여전히 배제 되어 보여지고(심지어는 키스마저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의 '정신적인 사랑'에만 집중할수 있게 만들어주는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동성애자들의 현실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본격 퀴어 영화가 될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고, 이 정도의 대중적 성공을 거둘수 있게 만든 현실적인 계산이기도 하다. 자신이 페어하다고, 혹은 소양이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는 딱 그만큼 수준의 솔직함.

따라서 이런 영화마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들은 구제불능이겠지만, 이 영화에 감동을 받고 박수를 쳤다고 해서 그가 진심으로 동성애를 포용했다고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화가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인 입장에서 반드시 도구로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 영화가 동성애의 표피만 빌려왔다고 해서 비난 받아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어쨌든 아주 조금은 동성애에 대한 이 사회의 관용도를 넓히는데 기여할수 있을지도 모를테니까.


넘어가서, 영화 속 '사랑'에 대해 짧게 이야기 해보자면,

두 주인공은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서로 다른 적극성을 보인다. 처음엔 잃을게 별로 없는 잭과, 지키고 싶은 가정이 있는 애니스의 현실 차이인듯 보인다. 그러나 상황이 변해서 더 이상 잃을게 없어 보이는 상황이 되어서도 애니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현실과 사랑에 대한 잭과 애니스의 인식과 용감함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한 연인은 함께 도망 가다가 살해 당하지만, 어떤 커플은 집안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헤어지는 그런 차이들. 그렇다고 해서 후자의 연인들이 덜 사랑했다거나, 혹은 애니스가 잭을 덜 사랑했다고 간단하게 말해버리는 것은 인간에 대한 섬세하지 못한 자세이다. 다만 인간이 자신이 결정한 한계에 얼마나 쉽게 적응해 버리는 특징이 있는가 하는가에 대한 증거일뿐.

그런 차이에 대해 이 영화는 이렇게 상반 된 결과를 보여준다. 더 용감해서 길거리에서 살해를 당하거나, 덜 용감해서 평생을 아쉬워하며 살거나. 하지만 이런 과장 섞인 질문을 받는다고 해서 무엇을 선택할지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절실하게 선택을 요구 받는 상황에서 그것은 쉽게 드러나니깐. 인간은 이미 그 답을 알게 모르게 자기 안에 갖고 살아가는 법이다.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거나, 그것은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머리 속에서 이미 자리 매김한 습관과 질서에 의해서 결정 된다는 얘기이다.



평점 : A-

Sisterhood of traveling pants.

제목 : The Sisterhood of traveling pants,2005
감독 : 켄 콰피스
출연 : 엠버 탐블린, 알렉시스 블레델, 아메리카 페레라, 블레이크 리벨리, 제나 보이드


청바지 돌려 입기로 상징 되는 소녀들끼리의 우정과 신뢰, 그리고 시련과 고통을 통한 어른으로의 성장을 그렸다. 자신의 소극성을 벗어 버리고 첫사랑 앞에서 솔직해지고 싶은 여자애와, 이혼한 아버지의 새로운 가족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는 여자애와, 축구코치를 짝사랑하다 결국 사고를 치고마는 여자애와, 12살짜리 꼬마 여자애로부터 삶과 죽음을 배우는 여자애..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이런 소녀들의 문제를 경쾌하면서도 나름 충실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소녀들이 다 한번씩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트릴때, 보는 이도 교감하며 함께 마음 찡할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 성숙의 중심에 그녀들끼리의 끈끈한 자매애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이다.

나름 유쾌하고 고개 끄덕이며 본 영화긴 하지만, 다 보고 난 후 이 '시스터후드'에 대해 다소간의 회의가 생기는건 역시나 너무 낙천적이고 밝은 이들의 관계로 인한 부분이다. 마치 친자매처럼 서로를 걱정하고 아껴주는 이들의 모습은 한국적인 현실에선 단 한번도 목격한적 없는 환타지에 가까운 풍경. 비교와 경쟁을 체제화 하고 있는 한국 교육 시스템의 유난한 폐해일수도 있겠지만, 미국이란 나라에서도 그리 일반적인 모습일리는 없을거 같은 관계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요' 라는 손녀의 외침에 '가라'고 손짓하는 할아버지라던가, 학생과 사고친 코치가 집까지 찾아와 너무나 쿨하게 소녀와 헤어지는 모습이라던가 하는, 그녀들의 갈등에 대한 손쉽고 보기 편한 해법제시는 이 영화의 태생이 헐리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한계가 된다. 한줄짜리 조언이나 해법으로 해결 될수 있는 고민들이었다면 애시당초 초중반 그녀들의 고통이 민망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하지만 그럼에도 변함 없는 것은 소녀들은 숙녀가 된다는 것이고, 그 성장통을 견뎌 내야 하는 것은 모든 소녀들의 숙명이며, 그것을 잘 치뤄낼수록 그들은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것. 그 진리를 제대로 이해시킬수 있었다면 이런 방법론적인 생략엔 다소 너그러워질수 있는 법이다. 간간히 의미 심장한 대사들과 감성적인 음악들이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 영화가 던져주는 몇가지 질문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 당신은 성장통을 제대로 겪어낸 성인인가 하는 것과, 당신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들인가 하는 것과, 당신의 주위엔 누가 있는가, 하는 질문들. 이것은 누구에게나 좀처럼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들인거 같다.

덧붙이자면, 사랑에 빠져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이란 저렇게 예쁜 것이었던가, 새삼 깨달은 것도 이 영화보기의 작은 수확이겠다.


평점 : B+

 

다빈치 코드 -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역사와 허구의 경계를 뒤져보는 일은 분명 매혹적이다. 그것이 상상력과 그럴듯한 이야기 솜씨와 결합될때엔 더욱 그렇다. 순 엉터리 얘기같지만 사실 그 안에 중요한 진실 한두개쯤이 포함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그 몰입의 속도를 배가 시킨다.


요즘 영화 개봉까지 앞두고 있다보니 새삼 다빈치 코드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몇몇 기독교 학자들은 소설에서 제시한 근거들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그 허구성과 악의성에 대해 비판한다. 그럴 지적 능력이나 증거제시능력을 갖지 못한채 '단지 독실할뿐인' 대부분의 신도들은 감정적인 분노로 자신의 신앙을 보호하려 애쓰고 있다. 인문학적, 예술사적, 역사학적 입장에서 이런 논쟁은 분명 흥미롭다. 하지만 사회학적으로는 아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혹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독선적이고 고지식한가에 대한 지겨운 증거밖에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 '소설'로서의 다빈치 코드는 칭찬할만한 성취는 이루어내지 못했음에 분명하다. 에코를 중심으로 한차례 열풍이 불었던 역사적 허구소설들의 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그 질적인 수준이 일단 기대 이하이다. 에코와 다른 작가들이 보여주었던 그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과 상상력은 보이지 못한채 단지 입증하기 쉽지 않은 몇가지 증거와 재치 있는 아이디어만으로 이미 거대한 성벽을 자랑하는 '역사'에 도전장을 내민다.

문학으로서의 한계는 더욱 심해진다. 문체는 전혀 수려하지 못하고, 케릭터들은 아무 개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주인공들이 사건을 풀어나가는 구성은 지나치게 헐리웃적인 것을 모방하고 있으며,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사는 아무 재미와 감흥을 생산하지 못하는 수준 낮은 지성과 유머로 점철 되어 있다. 작가가 제시하는 퀴즈와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의 구태의연함과 억지스러움 역시 재미를 반감 시키는 중요한 사유가 된다. 한마디로 이 책은 문학이 아니라 대중소설이다. 그것도 조금은 싸구려의 냄새가 나는.


그렇다면 다빈치 코드가 일개 오락물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무의미한 소설인가 라고 한다면 그렇진 않다는 것에 이 글을 쓰는 의의가 있다. 다빈치 코드의 힘은 오히려 쉬운 대중소설이란 점에서 발생하고, 그 힘의 근원은 보기보단 좀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질문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질문을 다루는 작가의 태도는 이만하면 진지하고 성실하다고 봐줄만하다. 그 질문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우리가 진실, 혹은 상식이라고 알고 있는 몇가지 것들을 전제로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1. 역사는 강자들의 승리에 관한 허풍 섞인 사실과 편파적인 허구들의 치밀한 조합으로 완성된다.

2. 어느 시점부터 인류는 여성성을 소외 시켜왔고, 그런 태도의 중심에는 정치, 혹은 정치화 된 종교가 있다.

3. 정치, 혹은 정치화 된 종교는 그 권력을 이용해 상대적인 약자들을 탄압해왔고 그 탄압은 아주 폭넓고 잔혹스러웠으며 종종 교활했다.  

4. 권력을 둘러싼 인간의 태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어떤 인간이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선택하는 것에는 순수한 이성의 힘보다는 그 자신의 소속이 더 큰 영향을 미치는게 일반적이다.

5. 종교는 이성(理性)에 반하는 신앙(信仰)을 존립근거로 삼지만, 막상 종교의 형성과 발전과정은 이성적인 체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시에 성전(聖典) 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사회에서 가장 지적이고 이성적인 성취들의 총합이게 마련이다.

소설 다빈치 코드의 의미 있는 질문은 위의 전제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을 소설과 관련해서 추출, 짧게 압축한다면 다음과 같다.

" 과연 기독교는 역사와 현재 속의 여성성의 잔혹한 압살에 대하여 결백한가? "

살해당하여 유기당한 여성성의 시체는 명백히 우리의 눈 앞에 놓여 있는데, 과연 그 과정 속에서 기독교는 무지로 인한 방관자의 책임밖에 없는 것인지, 혹은 적극적인 가담자의 입장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이 소설은 시작 되고, 그에 관한 명확한 입장표현이 결국 이 책의 핵심이다. 기독교는 단순한 가담자가 아니라 그 핵심을 이끌은 주범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실 기독교에 관한 한 문외한에 가깝지만, 성서가 지독하게 남성주의적인 시각으로 저술 되어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이 남자를 먼저 만들었고, 그 갈비뼈로 여성을 보조물로서 뒤늦게 창조했다는 그 시작부터, 인류를 타락 시킨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 시키는 원죄론, 예수의 12제자가 모두 남자이며, 그나마 유력하게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로서의 한 여성은 창녀라는 설정 등 이것은 단순히 무지로 비롯된 은유로 해석하기에는 너무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적 기술로 가득차 있다. 성서가 만일 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받아 적은거라면 그 신의 완결성과 존엄성을 심각하게 의심할수밖에 없는 아주 편협한 신일 것이며, 성서를 하나의 기록물, 사료로서 인정한다면 필연적으로 사실의 첨삭과 과장을 거쳐 치밀하게 완성 된 이데올로기일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어진다.


그렇다면 성서의 기술과는 다르게, 실제로 예수는 마리아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기독교의 본질과 별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기독교의 존립기반에 대해 무지하거나, 아니면 무관심 하거나. 사실 얼핏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이 논란을 중요하게 만든 것은 기독교의 예수에 대한 '신성부여'로 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신성부여는 그 믿음의 증명 여부와는 별개로, 다분히 인간에 대한 불신과 폄하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에 그 치명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 인간일수 없다는 것, 인간이어선 안된다는 것. 따라서 위의 질문을 명백한 진실로서 받아 들였던 소수의 역사속 인식들과, 이 작가와, 이 책과 교감한 독자들은 '인간성의 옹호'라는 측면에서 본의든 아니든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 신성부여의 부정의 근거가 하필 여성이라는 점에서 휴머니티의 회복 시도는 더욱 빛을 발한다. 어떻게 보면 저 사실 논쟁은 차라리 거짓으로 입증 되는게 인간 양심의 증거로서는 더욱 유효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책의 가치는 일단 이런 문제제기로 인해 그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