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정원' 을 보다


며칠전에 예고편을 볼때부터 이미 슬펐다.
영화가 시작하려는 순간부터 나는 가슴 안쪽의 아릿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랑하지만 시대와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이별해야 했던 연인들이라니,
단 몇달간의 사랑의 댓가로 십수년을 기다리고도, 그러고도 다시 만나지 못한 인연이라니.

초반부 감옥에서 나온 이젠 늙어 버린 남자가 고기를 한줌 입에 넣고 씹다가 뚝뚝 흘리는 눈물. 정말 슬픈 자의 눈물이란 저럴때, 저런 모습으로 터져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요 며칠 오디션 기간 동안 지겹게 봐왔던, 연기 초짜들까지도 참으로 무난하게 보여주던 그 처절하게 질러대는 고통의 비명과 눈물들, 오히려 그런 것이 가짜라는 것을 슬퍼보았고 울어보았던 이 나이의 나는 안다. 그래서 그의 그 슬픔에 나도 동참했다.


이 영화가 멜로라인에 충실하지 않고 시대와 인간에 대한 언급에 중반 이후 집중하는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그것이 이젠 특별히 참신하지도 않은 관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냥 아주 슬픈 연인들의 이야기를 기대했던거뿐이니까. 하지만 만드는 자의 책임감이란, 그런 언급을 하지 않으면 뭔가 얄팍한 장사꾼이 된듯한 죄책감을 느낄법도 한 일이다. 그래서 재미는 덜했지만 투덜거릴 필요까지는 없을거 같다.

이어서 본 '미녀는 괴로워' 도 바보스럽지 않은 대중영화였다. 여전히, 열심히 영화를 만드는 인간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이래저래 반가운 일이다.


집에 오는 길에 정이현의 소설집 하나와 황석영의 '오래 된 정원'을 사들었다.


내가 겪은 시대도 아니고, 내가 겪은 슬픔도 아니지만, 나는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거처럼 그날을, 그들을 추억한다. 이 책을 읽을 앞으로 며칠간은 아마 마음 한쪽이 묵직할거 같다.


Love in NG(내셔널 지오그래픽)

식사를 하며 무심코 채널을 돌렸다.
정확한 프로그램 제목은 기억 나지 않는데, 일종의 '끔찍한 장면 베스트' 였던듯.
아침부터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들을 보고 있자니 괴로와졌지만 그래도 눈을 뗄순 없었다.

어미의 자궁에서(상어가 자궁이 있다?) 먼저 부화해서는 다른 형제자매들을 먹어치우는 새끼상어 이야기에서부터, 기근이 시작 되자 배고픔을 못이겨 다 큰 어미 코끼리마저 습격하는 사자무리들의 이야기, 촬영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화산 폭발 장면 등등..

그런데 여기에도 사랑이 있었다.


하나. 아내의 추모식.

스카이 다이빙이 취미인 한 부부. 그 중 아내가 남편과 함께 오른 절벽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추락사 하고만다. 그로부터 얼마뒤, 홀로 남은 남편은 동료들과 함께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이빙 장소였던 거대한 폭포위에 오른다. 그리고 그곳에 아내의 뼛가루를 뿌리고 그녀를 그리며 그 너무나 높고 위험한 절벽에서 다이빙을 펼친다.


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남자.

10년전, 아내가 난산을 하며 죽음의 위기를 겪는다. 남자는 신에게 아내를 살려준다면 앞으로 15년간 매해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의 고행을 겪겠다고 맹세한다. 아내는 살았고 남자는 신에게 그 약속을 지키기 시작한다. 매년 정해진 날이 되면 그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손과 발을 못질 당한다. 고통을 참을수 없어 끔찍한 비명을 지르지만,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듯 망설임 없이 내년을 다시 기약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내의 생명을 자신의 고통과 기꺼이 바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중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무도 지킬 것을 강요하지 않는 약속을 12년간 지킬수 있을까.


...


세상엔 아직 사랑이 많다. 충분히 사랑하며 살지 못하는 우리들이 고개를 갸우뚱 할뿐이다.




야연(The Banquet) - 아주 오래 된 약속의 새벽.


11월 3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시절은 낙엽이 되었고, 주인 없는 약속은 밤바람이 되었다.

새벽이 깊어감에 벤치에 취한채 앉아 있던 남자는,

마침내 청춘에 대한 예의를 끝마쳤다는 허튼 위안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첫차가 오기까지 추위와 피로를 털어내야 했으므로,

근처의 어둑한 영화보는 공간에서 그는 지친 몸을 눕혔다.


어두운 그만의 공간은 갑자기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고,

그 현란함을 소화하기에 남자는 너무 술에 취해 있었다.

이 순간의 그 지독한 몽환을 못이겨하며 그는 순간 정신을 잃었고,

정신을 차렸을땐 스크린에선 이 서러운 목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는 엔딩 타이틀이 끝난 뒤에도 차마 일어서지 못했으며,

돌아오는 길 내내 현실감을 찾기 위해 바둥거려야 했다.

이 음악과 이 이미지들 속에서 허우적 거리던 그날 아침의

그는,

자신의 것도 아름답고 싶다는 갈증에 몹시 시달렸다.





0123

제목 :  야연 (夜宴: The Night Banquet, 2006)   
감독 :  펑 샤오강
출연 :  장쯔이, 다니엘 우, 유 게, 저우쉰, Jingwu Ma 






                 

用所有报答爱 / 张靓颖

一支歌,血最深的寂寞  场梦碎了山河


心,到分离才相遇  一滴,模糊了恩仇


我用所有爱   途里


此一刀两断  永不见风

한곡의 노래때문에 외로움이 핏빛으로 물들고

그저 하나의 꿈이 강산을 부수고

하나의 마음이 이별한 사랑을 만나게 하고

그저 한방울의 눈물이 은혜와 원한을 흐리게 하는구나.

모든 사랑으로 당신에게 보답했건만 당신은 돌아오질 않고

세월은...그때부터 관계를 끊었네

영원히 시련을 보지 않으리

시련을...시련을...



<Rumor has it> - '이별의 이유'에 관한 단상



'Rumor Has It' 이란 영화는 몇가지 미덕은 있지만 전체적으론 그저 그런 로맨틱코미디.

여기서 재밌는 포인트는 이런 부분이다.

자신의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결혼식 직전에 다른 남자와 도피여행을 떠났었다가 1주일만에 돌아왔다는 비밀을 알게 된 여자. 그녀는 어머니가 현실 앞에서 사랑을 포기하고, 평생 그를 그리워하며 살아온 모습을 상상하며 마음 아파한다. 그리고 혹시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상처 받을까봐 조심하는데...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은 아버지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녀가 아버지에게 묻는다. " 그런 어머니를 어떻게 용서하고 받아 들일수 있었나요? "

아버지, " 왜냐하면, 지금 그녀 곁에 있는건 그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자기 입으로 그와의 여행은 그냥 모험이었을뿐, 평생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였기에 돌아왔다고 말해주었으니깐. "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식의 전개를 살짝 빗겨가는 나름의 반전이라고나 할까.


....


나는 여기서 돌아온 그녀의 선택보다, 그런 그녀를 용서한 그의 태도에 흥미를 느낀다. 과연 이곳의 사람들은 사랑에 관해 어느 수준까지 관용적일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서도 용서할수 없어, 혹은 이해할수 없어서 헤어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다. 그들은 종종 ' 우리 헤어져! ' 를 상대에 대한 분노의 의미로 사용한다.

원인에 대해서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존재할지 몰라도, '헤어짐'이란 선택은 어떤 경우에서나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때론 그 선택의 공이 책임소재를 따라 종종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기도 한다. 그러나 '형벌'의 측면에서의 이런 이별선언이란, 이것은 자신에게도 비슷한 수준의 고통이 수반 되는 꽤나 미련스러운 선택이게 마련이다. 이성적으론 그렇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이런 미련한 짓들을 하면서 살아간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 혹은 현재의 잘못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이해할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려운 주제이다. '사랑' 앞에선 모든 것이 용서 되고 이해 되어야 한다는 만병통치적인 믿음은 인간의 현실적인 한계를 넘어선 범위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과거의 그 모습은 현재와 미래의 그에 대해 신뢰할수 없게 만든다, 라던가, 한번 저지른 잘못은 그의 미래의 잘못까지도 예상할 수 있게 만드는 본질적인 모습에 의한 것이다 라는 전제들은 상당부분 과장되고 과격한 가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저 영화에서의 상황을 예로 들자면, 남편의 입장에서는 결혼식 직전에 그런 짓을 하는 여자의 정조관념은 믿을수 없다, 라던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상처 주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여자의 사랑 같은건 믿을수 없다, 라는 이유를 대며 그녀에 대한 용서를 거부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별' 이라는 '결론'은 이성적인 범위에 있는 선택이다. 그런데 현재 자신이 겪는 상처, 분노 이런 것들은 다분히 감정적인 이유인 것이고, 그 사이의 괴리를 저런 식으로 나름의 이성적인 이유들을 찾아내서 스스로에게 주장하게 되는건 아닐까.

하지만 인간에겐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런 식의 절대적인 일관성을 담보로 하는 '틀림 없이 예상되는 결과' 같은건 없다. 과거의 그와 다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고, 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고.. 단지 그를 믿을 뿐이고, 결과론적인 관점에 의해서만 그 용서의 정당성을 판단할 수 있을뿐..


....


모든 사람들이 늘 한결 같은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게 가장 행복한 풍경이겠지만, 어쩔수 없이 헤어져야한다면, 항상 그 이별은 ' 서로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때' 만 벌어졌으면 좋겠다. 그것을 방해하는 이유를 많이 대면서 사는 인생은, 아마도 아주 외롭고 한심스러운 풍경으로 그를 맞이할 것이므로.



<라이 위드 미> - 아무도 없는 섹스.


감독 클레망 비고
배우 로렌 리 스미스 / 에릭 발포 / 리차드 셰볼로 


깐느에서의 호들갑스렀던 반응도 있고 해서 꽤나 자극적인 영화일줄 알았더니 의외로 얌전하다. 최근에 본 '천국의 전쟁', '브라운 버니' 에서의 그 롱테이크 펠라치오 씬에 비하면 이 정도는 멜로 수준. 단지 성기가 몇번 나오고 주테마가 섹스이고, 그 묘사가 좀 리얼하다고 해서 제한상영가 논쟁이라니, 애도.


영화의 줄거리는 심플하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중간에 질투와 다툼이 있고, 헤어지고, 그 빈공간을 못잊어 괴로와하다가, 다시 만난다. 끝.


단지 차별점은 여자가 관계 전체를 섹스로 인식하는 타입이었고, 이 두 남녀의 관계는 섹스를 중심으로 진행 되며, 각종 갈등 및 그리움으로 인한 고통도 결국 섹스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것.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려면 섹스란 단어를 한 백번쯤은 써야 끝낼수 있을거 같다.


음.. 섹스라....


섹스에 관한 가장 큰 환상은, 그것이 인간들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는 것에 있다. 그래서 도시인들의 고독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삶속에서의 섹스도 점점 거대한 위치를 차지하며 잠식해 들어온다. 범람하는 문화속의 섹스 코드, 점점 속도를 높여가는 섹스에 대한 호기심과 탐닉, 외로움의 이름하에 저질러지는 수많은 원나잇의 밤들, 저 시골 러브호텔까지도 꽉꽉 차는 풍요로운 섹스의 시대.


어차피 한 개인의 욕망을 인정하고 개방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진행 될수록 이런 방향으로 흐르는 변화를 거스를수는 없다. 말세야, 라며 운운하는 것은 꼰대들의 태도일뿐 이 시대에 발담그고 사는 우리가 택해야 할 자세는 아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섹스가 우리의 지친 영혼을 치유해준다고, 혹은 줄수 있다고 믿는 기대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이에 대해 거칠지만 단순한 반증들을 한번 나열해보자. 30년쯤전보다 섹스의 질적, 양적 레벨이 훨씬 높아진 현재, 사람들은 더욱 서로를 소외시키며 외로움에 떨고 있다. 가장 자유분방하게 섹스한다는 북유럽이 자살율은 가장 높다. 한 개인에게 있어 섹스를 몰랐던 어렸을때보다 알고 있는 지금이 덜 외롭거나 하는 일도 없다. 등등, 기타 등등.


물론 심신이 지친 어느 밤에 따뜻한 체온이 그리워지는 것은 인간적이다. 내 옆에 따뜻한 몸을 가진 그녀가 있다면 구원 받을수 있을거 같은 절실함은 그 순간만큼은 진정이다. 그래서 섹스란 기본적으로 진통제의 속성을 지닌다. 아주 찰나의 고통을 약화 시키거나 지연시키는 역할에선 효과적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에 그 본질적인 특징이 있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의 섹스 역시 마찬가지. 친밀감을 강화 시키고 소통의 계기를 마련하게 해주는 것까지만을 가능하게 해줄뿐,  만번쯤 섹스한다고 해서 그 둘이 서로에 도달하거나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미흡하기만 한 그 섹스를 넘어서서 그를 송두리째 먹어 버리고 싶은 갈증에 시달리잖아? - 그런적 없다면 재수강들 하시라.-  그 갈증에서 섹스의 강도를 높이는 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여줄 뿐이지 않더냔말이다. 존재의 고독을 달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을 담은 편지 한장, 따뜻한 포옹 그런 것이게 마련이라니께.



이 영화는 저 평범한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섹스로 시작해서 섹스로 관계를 유지해가는 것을 익숙해하는 한 여자. 그래서 한 남자에게 반해서 가까와지는거까지는 좋다. 소위 쿨하다. 자고 난 후의 '나를 쉽게 생각하면 어쩌지?' 라던가, '얘가 부담 주면 어쩌지?' 식의 너무나 한국적인 과정들은 생략 된다. 섹스와 관련 된 음침한 분위기를 배제한채 이들은 참으로 밝고 열정적으로 서로를 품는다. 그래, 선진적인 섹스는 저래야지. 아암.


근데 여기까지. 이후부터는 어째 찌질거리는 폼이 이 나라랑 크게 달라보이지 않게 진행 된다. 클럽에서 딴 남자들이랑 춤추는거 보면서 질투하더니 파괴적인 반응을 보이는 남자나, 별것도 아닌 것에 상처 받고 떠났다가 다시 매달리는 여자나, 그리고 서로 쌩까고 매달리고의 반복. 결국 인간은 거기서 거기라는 것만 열심히 증명해주고 만다.


이렇다보니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하품이 나온다.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속 부류의 특징이자 이 영화의 특징인, 관계의 중심에 지나치게 섹스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만나면 매번 자는 데이트에 익숙한 커플이 갈수록 관계의 공허함에 괴로와하게 되는 풍경과 비슷하다. 따라서 이렇게 몸에만 몰두하는 태도는 오로지 정신적인 가치가 최고라고 부르짖는 모습 못지않게 관념적이다.


이 영화 속 여주인공은 예쁘게 생겼다. 그리고 이 영화의 비주얼적인 포장도 꽤 그럴듯하다. 그러나 위에 말한 이유들로 인해 그들의 섹스는 쉽게 지겨워지고, 동시에 이 영화도 함께 지루해진다. 욕망이라는 이젠 흔해져버린 코드를 나열해놓고 자극적인 성기 노출로 화제를 모으고선, 인터뷰때는 고독한 현대인의 어쩌구저쩌구를 얘기하는 영화도 요즘은 진부하다. 사실 이 영화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이거 아니냐구.


자고났더니 좋아져 버렸네?


저 선후가 바뀌는 것에 과민한 알레르기 반응 일으키는 한국 정서에선 저것만으로도 나름 유효한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주인공 여자에게 이 이상이 없듯이, 이 영화에도 이 이상은 없다.



여튼 이래저래 요즘 연속으로 깐느 화제작들을 보고 있자니, 앞으로 여배우들은 좀더 고달파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뭐 기본적으로 남자배우의 꼬추를 입에 물 각오를 해야 좋은 배우라고 얘기 들을 수 있는 세상이 오는거 아닌가 싶어지니.


아, 내 와이프는 연기 시키지 말아야지...